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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objet a는 모순덩어리 아닌가요?  실재계의 결여라니 닿을수 없는 대상이라느니, 그 흔적의 자리라느니 떠들던데 결여(monque)라는
 실재계의 결여라니 닿을수 없는 대상이라느니, 그 흔적의 자리라느니 떠들던데 결여(monque)라는 것 자체가 완전체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빈자리가 될까요? 그자리에는 아무것이나 다 가져다놔도 욕망의 역동학이 일어난다는것에 의심 안드나요?    그리고 라캉의 이론은 임상치료도 언급이 드물뿐더러 임상치료는 자기파괴적 jouissance를 다른 objet petit a에의 유도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언급만 안할뿐이지 desire의 질적 비교의 전제가 숨어있네요? 세미나 VII에서 "정신분석의 미덕은 le maintien du désir." 라는 말과는 모순되지 않나요? 그리고 욕망의 양적비교는 왜 다루지 않는건가요?  또한 저런 임상치료의 방법은 점점 욕망의 감소로 이어지는데 이건 라캉의 영구한 objet a를 쫒는 것이라는 욕망의 역동학과 모순되지  않나요?    만약 욕망의 질은 유지하지만 강도는 줄이는 게 가능하다면, 라캉의 욕망 개념은 ‘순수한 영속성’이 아니라 ‘조건부 지속성’ 아닌가요?   심지어는 라캉을 페미나 퀴어에 비벼대는데 라캉과퀴어담론, 페미는 대립항이지 연접할수 없을텐데 어떻게 가능하나요?국내 관련서적 몇개 읽어봐도 죄다 2차인용, 인용날조, 오역투성이의 라면받침대밖에 안되던데… 어느지점에서 접점이 있는지 가르쳐주세요. 정말 뻔~히 보이는 논란점들인데 왜 안다루지요? 논문이고 관련서적이고 어느분도 이런 질문하는 분은 못봤네요? 제가 모르는 뭔가 숨은 이론구조가 있나요?   있다면 가르쳐주세요.대학원생, 전공자분, 관련 교수님분들 고견을 듣고싶습니다.*참 애틋하다느니 무지하다느니 내용도 없는 수사를 쓰는 무지한분들은 답변 삼가해주세요^^“
라캉의 이론에서 제기하신 여러 모순과 논란점들은 라캉 사상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라캉 이론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이론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의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objet a와 결여, 그리고 욕망의 역동성
objet a는 '결여'(manque)의 개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여는 '완전함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인 상실, 즉 존재의 근원적인 텅 빈 자리를 의미합니다. '결여'는 단순히 무언가가 빠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주체의 분열과 함께 생긴 빈 공간입니다. 이 빈 공간은 바로 욕망이 자리 잡는 근본적인 원인이 됩니다.
objet a는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주체가 찾아 헤매는 다양한 대상들로 나타나지만, 그 어떤 대상도 이 빈자리를 완전히 채울 수 없습니다. objet a는 실제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objet a는 '진정한'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흔적' 또는 '대상-원인'으로 불립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역동성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이유입니다. 어떤 대상이 그 자리에 놓이더라도, 그것은 objet a의 역할을 잠시 대행할 뿐, 결국은 주체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또 다른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임상치료와 욕망의 감소
라캉에게 정신분석의 목적은 욕망을 소멸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을 유지하는 것(le maintien du désir)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지'는 'jouissance'(향유)를 제어하고, 주체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파괴적인 향유(jouissance)는 주체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주체는 이 고통스러운 향유에 중독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신분석은 이 자기파괴적 향유의 고리를 끊어내고, 주체가 진정한 자신의 욕망(désir)을 찾아 그 길을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욕망의 질적 비교가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병적인' 향유(jouissance)에서 벗어나 '더 나은' 방식으로 욕망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의 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라캉은 '순수한 영속성'으로서의 욕망을 말하며, 이는 욕망이 결코 완전히 만족될 수 없기에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정신분석을 통해 욕망의 강도가 줄어든다는 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향유로부터 벗어나 욕망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라캉과 퀴어, 페미니즘 이론의 접점
라캉 이론과 퀴어/페미니즘 담론이 대립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상호 연접하는 지점도 있습니다. 라캉은 남근(phallus)을 상징계의 핵심적인 의미화소로 상정하면서 성적 차이(sexuation)를 설명했습니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캉의 이론은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생물학적 성(sex)이나 사회적 역할(gender)로 단순 환원하지 않습니다. 라캉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상징계 내에서 주체가 맺는 관계의 양상을 의미합니다. 주체는 남성 성적 위치에 있을 수도, 여성 성적 위치에 있을 수도 있으며, 이 두 위치는 서로 완전한 보완 관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모순적인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이 '불일치'와 '결여'의 개념이 퀴어 이론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퀴어 이론은 라캉의 이론을 재해석하여, 남녀 이분법적 성적 차이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 정체성과 욕망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활용합니다.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캉의 이론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달리 언어와 상징계의 규범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jouissance'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의 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일부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이 지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여성적 주체성이 상징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국내 서적의 오역이나 2차 인용의 문제는 라캉의 원전을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라캉의 세미나나 에크리 등 원전은 프랑스어 원문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영어 번역본도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라캉 이론은 난해하고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현실과 무의식, 그리고 욕망에 대해 깊이 사유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